게임 분석

바이오하자드 레퀴엠은 장르 융합을 어떻게 시도하였는가

Berple 2026. 4. 15. 00:17

올해 2월에 출시된 '바이오하자드 레퀴엠'이 엄청난 성과를 벌였다. 직접적으로 플레이 해보진 않았으나 나도 플레이 영상을 통으로 봤을 정도로 즐겁게 보았다.

 

바이오하자드 시리즈는 워낙 인기있는 시리즈지만, 이번 작은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 호평을 받으며 이번년도 고티 후보로 종종 언급되고 있다. (물론 GTA6라는 거대한 산이 있지만..)

바이오하자드 레퀴엠이 어떻게 일주일만에 500만장이 팔리며 대성공을 이루게 되었을까? 전작들과 바하 레퀴엠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바이오하자드 레퀴엠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듀얼 프로타고니스 시스템"이다.

 

"듀얼 프로타...가 뭔데?" 싶을텐데, 쉽게 말해서 하나의 작품에서 2명의 주인공이 동시에 활약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프로타고니스트'가 주인공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어찌됐건 중요한 것은, 바하 레퀴엠의 가장 큰 특징이자 오늘 다룰 이야기가 바로 두 캐릭터의 이야기를 번갈아 진행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개발진의 인터뷰에 의하면, 사실 바하 레퀴엠은 지금과는 완전히 방향을 추구하고 있었다. 본래 이 프로젝트는 오픈월드 기반의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이었는데, 게임이 산만해져 '공포 게임'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릴까 우려된 개발진이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개발진은 바이오하자드 7과 빌리지가 후반부로 갈수록 액션 위주로 편향되었던 과거 피드백을 수용하여, 프로젝트를 싱글 플레이어 기반의 서바이벌 호러로 전면 재부팅하는 결단을 내렸다.

 

바하 시리즈의 문제점은, 단일 캐릭터만으로는 유적들의 복합적인 니즈(생존 공포 + 액션 쾌감)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었다는 것. 이젠 인간을 넘어버린 레온이 변종 좀비따위로 공포를 느낄리가.. 개발진은 순수하게 호러 경험만 전담할 신규 캐릭터를 도입하기로 하였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시리즈 역사상 가장 겁이 많은 주인공(개발진 오피셜)인 그레이스다. 그리고 그녀와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베테랑 요원 레온의 귀환이 맞물려 레퀴엠의 듀얼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바하 개발진은 두 캐릭터의 차이점을 어떻게 설계하였을까? 무엇이 한쪽은 공포를, 한쪽은 액션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카메라 시점

바하 레퀴엠은 플레이어의 시각적 인지를 통제함으로써 장르적 몰입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시스템적으로 1인칭 or 3인칭 시점 전환을 지원하긴 하지만, 각 캐릭터의 기획 의도에 맞춰 의도된 권장 시점을 통해 특정한 감각을 유도했다.

 

공포를 극대화하는 1인칭 시점

 

그레이스의 플레이 파트는 1인칭 시점에 최적화되어 설계되었다. 1인칭 시점은 화면의 시야각을 제한함으로써 플레이어의 주변 상황 인지 능력을 의도적으로 저하시킨다. 이는 바하 시리즈 중 공포로는 역대급으로 꼽히던 바이오하자드 7이 증명했던 1인칭 시점의 문법을 계승한 것. 등 뒤에서 접근하는 적을 미리 인지할 수 없다는 불안감과 좁은 복도에서 몬스터와 직접 마주쳐야만 하는 심리적 압박감을 유발한다. 그레이스는 "시리즈 중 가장 겁쟁이" 타이틀에 걸맞게 무기 조준 시 미세한 손떨림과 공포에 질린 숨소리 내뱉는데, 1인칭 시점이 이를 플레이어의 감각과 동기화시킨다. 어두운 병원 복도에서 한정된 빛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전진해야 하는 그레이스의 플레이는 강력한 공포 요소로 작용한다.

바하7의 1인칭 시점

 

전술적 혜택을 주는 3인칭 시점

 

이와 대조적으로, 레온의 플레이 파트는 바이오하자드의 주장르인 3인칭 숄더뷰를 기본으로 하여 입체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3인칭 시점은 플레이어에게 넓은 주변 시야를 제공하여 적의 배치, 기믹, 퇴로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전술적 혜택을 부여한다. 다수의 적에게 포위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레온 플레이에서, 플레이어는 공간을 넓게 활용하며 적의 제압해야 한다. 적의 다리를 쏜 후 체술을 연계하는 흐름, 날아오는 거대한 톱날을 도끼로 쳐내는 패링 동작은 플레이어가 캐릭터의 전신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3인칭 시점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바하4 리메이크의 3인칭 시점

 

 

 

UI

숨이 턱턱 막히는 인벤토리

 

그레이스의 인벤토리는 아주 제한적이다. 게임 초반부 그레이스의 인벤토리는 8칸의 슬롯밖에 없다. 무기와 회복약뿐만 아니라 게임 진행에 필요한 중요 아이템조차 슬롯 자리를 차지한다. 이러한 제약은 플레이어에게 지속적으로 선택의 고통을 안겨준다. 맵 구석에서 새로운 탄약을 발견하더라도 인벤토리가 가득 차 있다면, 플레이어는 무언가를 버리거나 아이템 박스가 있는 곳까지 왕복해야 한다. 제한된 인벤토리 시스템은 캐릭터가 겪는 무력함을 시스템적으로 뒷받침하며, 플레이어가 자원 소모에 더욱 민감하도록 만들며 한정된 자원 안에서 적에게서 도망쳐야 하는 공포 요소를 자극한다.

그레이스의 인벤토리 UI

 

인벤토리 압박에서 벗어난 레온

 

레온은 '아타셰 케이스'(일명 서류가방) 시스템을 통해 전혀 다른 인벤토리 경험을 제공한다. 레온의 인벤토리는 일종의 공간 테트리스 퍼즐로서 작동한다. 플레이어는 권총, 샷건, 수류탄, 회복약 등을 이리저리 회전시키고 재배치하여 가방 공간을 최적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시스템은 자원 부족과 결핍에 대한 스트레스보다는 효율성과 정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플레이어는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여 탄창을 채우고 회복약을 만들어 미리 준비하는 전술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강해지는 적들을 상대로 화력의 우위를 점해나가는 액션 장르의 재미와 연결된다.

레온의 인벤토리 UI

 

또, 우측 하단에 나타나는 둘의 UI가 살짝 다른데, 그레이스는 체력바가 보이지 않고 무기만 나타나지만, 레온은 무기와 호 형태의 체력바가 함께 UI로 나타난다. 그레이스의 HP는 그레이스가 피해를 입거나 인벤토리를 열었을 때 바이탈 형태로 체력바가 나타난다.

왼쪽이 그레이스 플레이 시 UI, 오른쪽이 레온 플레이 시 UI
적에게 물리면 왼쪽 하단에 나타나는 바이탈(HP게이지) UI

 

 

 

전투 디자인

생존이 먼저인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신체적 취약함을 갖는 데다 사용 가능한 무기가 제한적이다. 탄약이 매우 부족한 그레이스 파트에서는 적과 정면으로 총격전을 벌이는 것은 자원 고갈을 초래한다. 따라서 공격력보다 은신과 회피에 무게를 두고 설계되었다. 대신 그레이스는 적 피를 수집해 탄약이나 근접 무기, 혹은 좀비를 아예 분해시키는 특수 혈청을 제작하는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결국 그레이스는 총격보다는 좁은 공간에서 적을 피해 몰래 이동하거나 잠입 킬을 시도해야 하며, 무기가 파손되거나 탄약이 떨어지면 맨손으로 버텨내던지 도망쳐야하는 생존 호러 스타일이다.

 

능동적이고 화끈한 액션을 선보이는 레온

 

반면 레온은 전면전을 지향한다. 그레이스보다 훨씬 다양한 화기를 갖추며, 근접 무기로 전투용 도끼를 사용해 타격과 패링이 가능하다. 또한 레온은 폭발물과 연사 무기를 다루며, 명중 시 상대를 기절시키거나 일제 사격으로 적을 한 번에 처리하는 등 대량 제압에 특화된 전투 메커닉을 선보인다. 다양한 무기와 근접 체술로 다수의 적을 제압하는 레온의 전통적인 전투 방식은 서바이벌 호러의 분위기와 반대되는 재미를 제공한다.

 

 

 

레벨 디자인

그레이스 파트의 맵은 대체로 좁고 폐쇄적이며 복도를 자주 오가는 구조다. 은신과 잠입이 용이하도록 장애물이 많고, 퍼즐 요소가 곳곳에 배치된다. 반면 레온 파트는 좀 더 넓은 전투 공간 위주로 설계됐다. 개방된 교전 영역이나 주를 이루며 이동형 기믹이 있어 좀 더 활발한 전투를 지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은 그레이스가 좁은 지하로 내려가 탐험을 진행하는 반면, 레온은 옥상에 올라가 좀비 무리와 싸우기도 한다.

좁고 폐쇄된 공간(정신병원)에서 플레이하는 그레이스 파트
넓은 곳(라쿤시티)에서 플레이 하는 레온 파트

 

 

 

자원 관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레이스는 자원의 희소성을 극대화하여 플레이어로 하여금 매 순간마다 신중한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레이스로 플레이할 때에는 탄약과 아이템을 항상 아껴써야 한다. 좀비의 혈액을 모아 필요한 아이템을 보충할 수 있지만, 그다지 넉넉하지 않다. 만약 플레이어가 회복약을 잘못쓰거나 탄환을 낭비할 시 치명적인 제약으로 돌아온다. 

 

레온 파트는 비교적 자원이 풍부하다. 적을 무찌르면 화약과 금속 조각이 떨어지며, 이를 모아 총알과 폭탄을 제작할 수 있다. 또한 전투 보상으로 얻게 되는 통화로 무기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어 파워 커브가 완만하다. 즉 그레이스가 제한된 양으로 최대한 오래 버티도록 요구된다면, 레온은 계속 싸우며 자원을 채워나갈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런 차이는 플레이어에게 각 파트의 목적을 명확히 인지시킨다.

 

 

 

페이싱(Pacing)

바이오하자드 레퀴엠은 그레이스의 긴장감 고조 구간과 레온의 액션 해소 구간이 교대로 진행되면서 독특한 리듬을 만든다. 이는 "호러 구간과 액션 구간을 섞어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것처럼 플레이어의 긴장과 쾌감을 반복시킨다" 는 개발진의 의도이다.

 

초반에는 그레이스가 어둡고 폐쇄된 환경을 천천히 탐색하며 작은 소리 하나에도 벌벌 떨며 긴장감을 주고, 레온으로 전환되면 아까는 쩔쩔매다 좀비 떼를 상대로 전투하며 해방감을 준다. 이런 긴장-해소 반복 구조는 잦은 플레이타임 전환에도 싱크로율이 높아 플레이어가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시스템 대부분은 모두 바하 시리즈에 존재하던 것들이다. 1인칭 시점과 인벤토리 압박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던 그레이스 파트는 특히 바이오하자드 7에서, 3인칭 숄더뷰와 넉넉한 인벤토리로 액션에 치중한 레온 파트는 바이오하자드 4 리메이크에서 두드러졌던 시스템이다. 바하 시리즈가 30년을 넘어가면서 시도했던 많은 시스템을 조합해 서바이벌 호러 + 전투 액션을 융합한 결과물이 바로 바이오하자드 레퀴엠이다. 사실 액션의 재미가 강할수록 공포심을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에 공포와 액션성이 동반되기가 어려운데, 바이오하자드 레퀴엠은 이 2가지 재미를 정말 잘 융합한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요즘들어 2가지 이상의 장르를 섞어 하나의 게임 안에서 여러 장르를 선보이는 '장르 믹스'가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것 같다. (명일방주:엔드필드, 낙원, 여러 인디 게임들, 붉은사막...도 장르믹스라고 해도 될지..) 서로 다른 장르를 섞는게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하 레퀴엠이 성공한 이유는 각 장르의 재미를 끌어올리기 위한 정교한 시스템 설계도 있지만, 장르가 바뀌는 지점(페이싱)까지 놓치지 않은 것이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번 글을 작성하면서 바하 레퀴엠이 장르 믹스를 지향하는 게임 디자인에 있어 꽤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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